최유기 ::: 저팔계




   팔계가 바란 대로 그는 면접에 붙었다.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그는 금방 직원들과 가까워졌고, 일을 잘 하는 능력이 인정받아 나름대로 평화로운 직장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적어도 제 관심을 앗아간 산옥이 근래 비서실에서 꿈쩍도 안 하고 일만 한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는 아무래도 비서다 보니 전무가 시키는 일이 없지 않는 한 비서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점심도 전무와 먹으니 말 다 했지. 산옥은 밥 먹으러 갈 때나 퇴근 외에 먼저 팔계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사실 마주칠 일이 없으니 말 걸 일도 없었다. 사내 메신저도 전무 외에는 주고받지 않고 퇴근해도 도원향으로 가는 발길을 딱 끊었는지 강류가 별 일이라고 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그렇게나 쏟아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팔계가 오랜만에 본 산옥 얼굴은 파리해져 있었다. 그는 탕비실에서 차를 막 다 마신 참이었다.
   “염 비서님.”
   “아, 팔계 씨. 좋은 아침.”
   “잠 잘 못 주무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그럼요. 신경 쓰지 마세요. 맞다, 팔계 씨. 나 좀 도와줄래요?”
   “네?”
   “자료실에서 자료 꺼내야 하는데 내가 손이 안 닿는 위치라.”
   “아, 네.”
   산옥은 팔계를 데리고 자료실로 갔다. 그는 대번에 신경질을 냈다.
   “이 문 아직도 안 고쳤네. 이거 제멋대로 잠기는데.”
   “안 잠기게 뭔가 고정이라도 시킬까요?”
   “금방 자료만 찾을 거니까 괜찮겠죠. 이 쪽으로.”
   살짝 문을 열어둔 채 그들은 자료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산옥은 책장 한 곳에 멈춰 위를 가리켰다.
   “저거 B31번.”
   “네.”
   팔계는 가볍게 그것을 꺼내 산옥에게 쥐어 주었다. 그리고 나가려 했는데 덜컥, 하고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작은 음악이 들렸다.
   “망했다. 잠겼어.”
   “네?”
   “잠깐만 기다려요.”
   산옥은 팔계에게 자료를 건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수고 많으십니다. 여기 3층 자료실인데 문이 잠겨서요. 혹시 언제쯤 오실 수 있으실 까요? 네? 30분 뒤요? 저기, 전무님께 자료를 갖다 드려야 하는데요. 수리 직원이 부재라 언제 올지 모른다고요? 하아, 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무님, 자료는 찾았는데 지금 자료실 문이 잠겨서 나갈 수가 없어요. 직원은 30분 뒤에야 온다는데 어쩌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 팔계 씨랑 같이 있거든요. 네, 걱정 마세요. 네.”
   전화 두 건을 마치고 산옥은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대강 상황은 알겠죠?”
   “네.”
   “아, 피곤해 죽겠네.”
   “구석에서 잠깐 눈 좀 붙이실래요?”
   “나 잠들면 못 일어나요.”
   “제가 깨워드리면 되죠.”
   “일단 구석으로 가죠.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들은 구석에 대강 주저앉았다. 산옥은 앉자마자 잠이 쏟아지는지 길게 하품했다. 팔계가 그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조금이라도 눈 붙이세요.”
   “진짜 깨워줄 거예요?”
   “네.”
   “알았어요. 믿어봅니다.”
   산옥은 기대어 그대로 잠들었다. 고른 숨을 뱉는 그를 팔계가 단단히 감싸 안았다.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렇게 사람이 며칠 만에 지쳐버린 걸까. 그래도 지금 잠들면 조금이나마 퇴근 전까지 버틸 힘이 생기겠지. 팔계는 산옥을 보다 문득 입술에 시선을 빼앗겼다. 면접 보러 간 날, 손가락에 닿던 온기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술기운에 탐했던 것과는 어쩜 그리 다르던지. 팔계는 침을 삼켰다. 산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그런 그가 눈을 뜬 건 팔계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뭘 그렇게 봐요. 내 입에 침 묻었어요?”
   “푸.”
   “잠깐, 진짜 침 묻었어요?”
   팔계 반응에 산옥이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팔계가 그러지 못하게 막고 말했다.
   “아직 30분 다 안 됐거든요?”
   “말 돌리지 말고.”
   “키스해도 돼요?”
   “엉?”
   설마. 그것 때문에 계속 쳐다본 건가. 깰 때까지 기다린 걸 잘 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음흉하다고 욕을 해야 하는 건지.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려니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계세요?”
   “네!”
   “잠시만요, 문 열어 드릴게요.”
   둘은 구석에서 일어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팔계는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는 듯 채근하는 눈빛으로 산옥을 보고 있었다. 산옥은 그를 힐끗 보곤 발돋움을 하고 말했다.
   “그 때는 실수였어요, 실수. 그리고 이런 장난 회사에서 치지 말도록 해요. 알았어요?”
   “알겠어요.”
   팔계는 잠깐 놀라긴 했지만 찌푸려진 미간을 보고 손가락으로 미간을 펴 주더니 산옥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이 문 진짜 고쳐야겠어요. 이렇게 잠길 때마다 열어주는 것도 한 두 번이잖아요.”
   “안 그래도 오늘 고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죠.”
   산옥은 수리 직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팔계에게 말했다.
   “서류 가져다 드릴 건데 같이 갈래요?”
   “네.”
   “싫다는 소리는 안 하네.”
   “비서님 피곤하신데 제가 너무 붙어있나요?”
   “됐어요. 회사 안에서는 어쩔 수 없지.”
   “맞다, 비서님.”
   “네?”
   “사내 메신저 보내도 돼요?”
   “나한테 보낸 적 없어요?”
   “아무래도 비서님하고 업무가 겹칠 일은 없다보니까.”
   “네, 그래요. 보내도 돼요. 이상한 말만 아니면.”
   “감사합니다.”
   이상한 말이라. 팔계는 산옥이 보인 의중을 알 것 같아 작게 웃었다.